마태복음은 신약성서 중에서도 구약 성경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이해와 인용을 보여주는 복음서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 복음서의 저자로 전해지는 마태는 당시 사회에서 멸시받던 세리였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 어떻게 그토록 정교하고 체계적인 구약 지식을 갖출 수 있었는지는 흥미로운 역사적, 신학적 질문이다.

 

로마 세금 시스템과 세리의 실제 역할

세리의 사회적 지위와 요구 능력

1세기 로마 제국의 세금 징수 시스템은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체계적이었다. 세리(publicani)들은 단순한 세금 징수원이 아니라 로마 정부와 계약을 맺은 공공 사업자들이었다. 이들은 세금 징수뿐만 아니라 군대 보급, 항구 관세 관리, 공공건설 프로젝트 감독 등 다양한 공공업무를 담당했다.

 

세리들이 속한 계급은 주로 기사계급(equites)이었으며, 이는 원로원 계급 다음가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계층이었다. 기사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4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으며, 이는 일반 보병 450명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세리들은 "사회적으로는 멸시받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세리에게 요구되는 문해력과 언어 능력

로마의 세금 시스템은 franchise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세리들은 자신이 담당한 지역에서 로마에 납부할 정확한 금액만 전달하면 되었고, 나머지는 자신의 이익으로 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회계 능력과 문해력이 필수적이었다.

 

특히 갈릴리 지역의 세리들은 최소한 세 개 언어를 구사해야 했다. 로마 정부와의 소통을 위해서는 라틴어나 그리스어가 필요했고, 현지 주민들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아람어가 필요했다. 또한 세금 영수증과 각종 문서 작성을 위한 문해력은 기본적인 요구사항이었다.

 

1세기 유대사회의 교육 시스템

회당 중심의 교육

1세기 유대 사회에서는 회당이 교육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회당의 주요 기능은 토라 낭독과 가르침이었으며, 이는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예배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이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모든 마을에는 회당이 있었고, 회당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초등학교가 있었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1세기 회당들이 후대의 회당들과 달리 기도보다는 토라 연구에 초점을 맞춘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말라와 막달라의 회당 유적에서 발견된 벽 주변의 벤치들은 중앙에서 이루어지는 토라 낭독과 가르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유대인 남성의 기본 교육

유대 남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토라 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비록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조직적이고 의무적인 초등교육 시스템이 있었다는 증거는 부족하지만, 유대 공동체에서 토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남성들에게 기대되는 교양이었다.

 

특히 신명기 66-9절의 명령("이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은 유대 가정에서 자녀 교육의 종교적 의무로 여겨졌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문해력

문해력에 대한 학술적 평가

1세기 팔레스타인의 문해률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바트 어만(Bart Ehrman)은 갈릴리 지역의 문해률을 5-10% 정도로 추정한다. 반면 캐서린 헤저(Catherine Hezser)는 로마 팔레스타인의 문해률을 10-15%로 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들은 이전 추정보다 높은 문해률을 시사한다. 특히 아라드 요새에서 발견된 18개의 서판을 분석한 결과, 최소 12명의 서로 다른 필체가 발견되었다. 이는 해당 군사 전초기지에서 상당수의 인원이 읽고 쓸 줄 알았음을 의미한다.

 

세리의 문해력 요구사항

세리의 업무 특성상 높은 수준의 문해력이 요구되었다. 세금 징수는 복잡한 계산과 문서 작성을 포함했으며, 이는 일반적인 문해력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교육을 필요로 했다. 실제로 세리들이 작성한 세금 영수증들이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발견되고 있어, 이들이 다국어 문해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태의 구약 지식 형성 과정

유년기 교육의 기반

마태가 유대인이었다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회당에서 토라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히브리어 알파벳을 익히고, 토라의 주요 구절들을 암송하는 것이 남성 교육의 기본이었다. 비록 갈릴리 지역의 히브리어가 완전히 순수하지는 않았지만, 교사들은 가능한 한 정확한 발음과 경건한 태도로 가르치려 노력했다.

 

세리로서의 언어적 역량

세리로서의 경험은 마태에게 다국어 능력과 문서 작성 기술을 제공했을 것이다. 갈릴리의 세리들은 로마 행정부와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다양한 언어와 문화에 노출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복음서를 작성할 때 다양한 독자층을 고려한 글쓰기 능력으로 발전했을 수 있다.

 

제자 시절의 심화 학습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후, 마태는 랍비적 전통에 따른 더 깊이 있는 성경 연구에 참여했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제자들과 함께 성경을 해석하셨기 때문에, 마태는 메시아적 관점에서 구약을 재해석하는 방법을 학습할 수 있었다.

 

특히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반복적인 표현은, 마태가 예수님의 생애를 구약 예언의 성취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해석학적 접근은 단순한 암송을 넘어선 깊이 있는 신학적 사고를 요구한다.

 

결론

마태의 구약 지식은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 결과로 볼 수 있다. 첫째, 유대인으로서 받은 기본적인 토라 교육이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둘째, 세리로서의 업무 경험은 그에게 높은 수준의 문해력과 다국어 능력을 제공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면서 받은 랍비적 교육은 그의 신학적 이해를 심화시켰다.

 

따라서 마태의 경우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분류되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교육적 배경과 지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구약에 대한 깊은 지식은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학습과 경험의 축적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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