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 보헤미아 반란은 유럽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분쟁 중 하나인 30년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 반란은 1618년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으로 시작된 보헤미아의 저항이 본격적인 정치적 혁명으로 발전한 사건으로, 페르디난트 2세의 폐위와 프리드리히 5세의 새로운 보헤미아 왕 선출이라는 극적인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단순한 지역적 반란을 넘어 유럽 전체의 권력 균형을 뒤흔들었으며,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갈등, 합스부르크 패권에 대한 도전,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반란의 역사적 배경과 종교적 갈등
보헤미아의 종교적 전통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책
보헤미아 반란의 뿌리는 16세기부터 축적된 깊은 종교적 갈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보헤미아는 본래 로마교황청이 신변 보호의 약속을 깨고 종교 재판을 통해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를 처형한 것에 반발하여 후스 전쟁을 경험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보헤미아는 종교적 관용과 개신교에 대한 친화성을 발전시켜왔다.
16세기 후반 보헤미아 시민들은 루터파와 칼뱅파, 가톨릭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고 경쟁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분열 속에서도 보헤미아는 서서히 쇠퇴해갔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의 내부 분열을 이용하여 왕권을 유지해나갔다. 특히 1609년 루돌프 황제가 신교도에 대한 관용을 취소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헤미아의 상당한 세력이 들고 일어났고, 위협을 느낀 황제는 "황제의 칙서"를 발표하여 신교도의 권리를 인정하고 위기를 넘겼다.
페르디난트 2세의 반종교개혁 정책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철저한 가톨릭 세력으로서 독실한 로마가톨릭 신자였고, 친로마가톨릭 성향이 강한 정책을 펼쳤다. 전쟁은 새로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영토에서 반종교개혁을 시행하려고 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을 그의 국민들에게 강요했으며,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보장받은 종교 선택의 권리가 위반되자 분노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반대했다.
마티아스 황제는 "황제의 칙서"의 정신을 침해하였고, 제국의 수도를 빈(비엔나)으로 옮기면서 많은 보헤미아 인들에게 "보헤미아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다"라는 실망감을 주게 되었다. 마티아스 황제는 후계자가 없었고, 후계자 없이 황제가 죽게되면 보헤미아는 명실공히 페르디난트 대공이 차지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과 반란의 촉발
1618년 5월 23일의 결정적 사건
1619년 보헤미아 반란의 직접적인 발단은 1618년 5월 23일에 발생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었다. 이날 아침 투른백작을 중심으로 한 보헤미아의 신교대표단은 수많은 군중을 거느리고 흐라드신의 왕궁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상징인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상이 굽어보는 대문을 지나 안뜰로 몰려갔고, 그곳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티안이 프라하를 떠나면서 내세운 두 대리인인 슬라바타와 마르티니츠가 앞에는 군중, 뒤에는 돌밭인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있었다.
무수한 손들이 창문을 떼어내고 그 둘을 아래로 내던졌으며, 보헤미아 신교도들의 우두머리격인 투른백작은 수많은 프라하의 귀족들과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비열한 황제의 두 대리인은 우리 방식대로 처리했다. 이제 이곳 보헤미아에 우리의 정부, 우리의 국가를 설립하자!". 이 사건에서 두 대리인과 서기 필립 파브리시우스는 약 21미터 아래의 해자로 떨어졌으나, 거기에 쌓여있던 쓰레기 더미가 그들의 추락을 완화시켜 모두 살아남았다.
반란의 즉각적 확산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은 즉각적으로 보헤미아 전역에 반향을 일으켰다.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이를 계기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곧 개신교도들은 임시 정부를 형성하기도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북유럽과 중앙유럽에 공포를 퍼뜨렸고,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던 개신교 국가 보헤미아 왕국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반란은 보헤미아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귀족들 대부분이 루터파와 칼뱅파였던 오버외스터라이히가 반란에 동참했고, 곧 니더외스터라이히가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에는 진트리히 마타야스 트런이 비엔나 성벽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1619년의 결정적 정치적 변화
페르디난트 2세의 폐위와 황제 선출
1619년은 보헤미아 반란의 가장 중요한 해였다. 1519년 3월 20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마티아스가 사망하자 황제의 자리는 7선 제후들에 의해 선출될 때까지 비워져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마티아스 황제가 사망하고(1619년),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겸임(재위: 1619~37년)하게 되자, 보헤미아의 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개신교 제후 연합의 중심적 존재였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의회에서 보헤미아의 왕(재위: 1619~20년)으로 선출하고 황제에게 대항하였다.
1619년 8월 19일,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위에서 '폐위' 한다고 선언했다. 이제 보헤미아인들이 페르디난트를 폐위시킴으로써, 더 이상 보헤미아인들과 페르디난트의 화해 가능성은 없어져 버렸다. 이 선언으로 보헤미아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군주 (보헤미아 왕)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단지 헝가리 왕이나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지위의 페르디난트와의 대립으로 상황을 규정했다.
프리드리히 5세의 보헤미아 왕 선출
1619년 8월 26일,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왕으로 선포하였다. 8월 28일, 이 소식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를 뽑는 선제후 회의에 전달되지 못했고 프리드리히 5세는 불리한 표대결을 하는 것보다 페르디난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 선출에 동의함으로써 모두의 합의에 의해 페르디난트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페르디난트의 폐위와 프리드리히 5세의 선출이 알려져 독일의 30년 전쟁은 본격화 되었다.
프리드리히 5세는 1619년 11월 4일 프라하에서 즉위식을 가져 보헤미아 왕위에 올랐다. 22세의 젊고 야망을 가진 그는, 황제가 되어야 하는 꿈을 앉고 페르디난트와 대결하려고 하였다. 프리드리히 5세는 7명의 황제를 선출하는 팔츠의 선제후로서 제국 내 귀족들 중에 최고의 서열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부인은 영국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였으며, 그의 여동생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장남의 부인, 네덜란드 총독은 외삼촌으로 가문적으로도 빵빵하였다.
프리드리히 5세의 고민과 결정 과정
프리드리히 5세의 보헤미아 왕위 수락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프리드리히는 1619년 9월 12일, 로텐부르크 (Rothenburg)에 신교도 동맹을 소집하여 동맹자들에게 보헤미아 왕위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의 신교도 동맹원들이 경고를 할 뿐이었다. 멀리서 반(反) 합스부르크 외교 전선을 펼치던 베네치아도 반대했고, 프리드리히의 친척도 반대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 왕관을 받게 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그대는 이전에는 왕의 딸을 맞이할 수 있을 만큼 자신만만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가져다 바치는 왕관을 쓰는 것도 망설이는군요? 나는 선제후의 연회장에서 호화로운 축제를 벌이느니, 비록 작더라도 왕의 테이블에서 빵 조각을 먹는 것을 선택하겠어요!"라고 말했다.
유럽 각국의 반응과 정치적 파급효과
가톨릭 연맹의 결집
보헤미아 반란과 프리드리히 5세의 왕위 즉위는 유럽 전체의 정치적 균형을 뒤흔들었다. 로마가톨릭이 대부분이었던 남부의 제후국이 이에 반대했고, 이들은 바이에른 선제후를 중심으로 황제를 지지하기 위해 가톨릭 제후연맹을 결성했다.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며 전쟁에 참여하자, 이에 대항해 여러 목적을 가진 개신교 국가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해 전쟁에 참여했다.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은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였고, 그러한 결의로 가톨릭 연합군은 개신교 연합군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619년 8월 28일 페르디난트가 신성 로마 황제로 만들어졌어도 그는 스페인, 폴란드와 몇몇의 독일 왕자들의 지지 만을 받았다.
개신교 국가들의 제한적 지원
반면 프리드리히 5세는 예상했던 것만큼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페르디난트는 황제로서 다른 신교도 제후들의 지지를 얻는 반면 프리드리히 5세는 제국 내 신교도 제후국이나 자신과 관련이 있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등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들 나라는 페르디난트의 외교술에 의해 독일의 국내 문제로 치부해버리거나 각 국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프리드리히 5세를 지원하지 않았다.
당시 팔츠 선제후와 인척 관계였던 잉글랜드 왕국이 1625년 전쟁에 개입했고, 홀슈타인에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덴마크-노르웨이가 같은 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스페인에 맞서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던 네덜란드 공화국도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 국가였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도 이들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베틀렌 가보의 개입과 헝가리 전선
보헤미아 반란의 중요한 변수 중 하나는 트란실바니아의 베틀렌 가보의 개입이었다. 베틀렌 가보는 일거에 병력을 끌어모아 헝가리로 진격했고, 그의 병력은 거의 30,000명에 달하는 막강한 병력이었다. 물론 트란실바니아의 특성상 대부분의 병력이 경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공성 능력이나 회전 능력은 떨어졌지만, 평원을 달리는 그 기동력은 엄청났다. 1619년 8월, 헝가리 전역이 베틀렌 가보의 파괴적인 진격 앞에 노출되게 되었다.
이러한 베틀렌 가보의 참전은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보헤미아인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었고, 페르디난트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보헤미아인들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고, 황제 선거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 때, 페르디난트에게 강력한 일격을 선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반란의 군사적 전개와 백산 전투
초기 군사 작전과 전투들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한 직후 베드르지흐(프리드리히 5세)는 진드리히 마타야스 트런 백작과 더불어 보헤미아-팔츠-지벤뷔르겐의 개신교 연합군을 이끌고 빈을 공격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선제공격으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은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였고, 그러한 결의로 가톨릭 연합군은 개신교 연합군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스코크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던 황제는 보헤미아와 그들의 동맹국을 그의 압도하는 수로 누르려고 했다. 황제군의 사령관 부코이 백작은 에른스트 만슈펠트가 지휘하는 개신교도 제후동맹을 1619년 6월 10일 사브레 전투에서 격퇴시켰고, 이것은 트런 백작이 프라하와 연계하지 못함으로써 비엔나 포위를 푸는 계기가 되었다.
1620년 백산 전투의 결정적 패배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팔츠의 총사령관이었던 안할트(C. v. Anhalt)로 하여금 최후 결전을 준비하게 했다. 1620년 11월 8일 안할트는 21,000명으로 구성된 보헤미아-팔츠 연합군을 이끌고 프라하 서부 근교의 얕으막한 구릉인 하얀 산이라는 뜻의 빌라호라 백산 전투에서 카렐 보나벤투라 부쿼이와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가 이끄는 28,000명의 부대에 대패했다.
백산 전투에서 좋은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한 백전노장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는 재빨리 증원군을 보내 일제히 도하를 시작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군의 측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의 독단적인 움직임에 부쿼이 백작 샤를 보나벤튀르가 반발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보헤미아 반란 토벌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은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까지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를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에 황제군도 도하하여 전투에 합류했다.
비록 처음에 기병대 간의 대결은 보헤미아에게 우세하게 흘러갔으나 보헤미아 보병들이 사정거리가 닿지도 않는 거리에서 일제히 무의미한 사격을 하고 그대로 후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휘하 가톨릭 동맹군에게 패했고, 결국 1619년 11월 4일, 보헤미아왕으로 즉위한 그는 그해 겨울에만 그의 치세가 나타날 것이라는 '겨울왕'이라는 호칭이 구교도들에 의해 들렸다.
반란의 결과와 역사적 의미
프리드리히 5세의 실권과 망명
백산 전투의 패배로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 왕위에서 물러났고, 1621년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와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이 군사를 일으켜 서부 독일 지역에서 싸웠으나 역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에게 패하고 1623년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 1628년에는 바이에른이 오버팔츠를 합병하고 프리드리히는 복위하지 못했다.
1621년–1622년 기간, 팔츠는 스페인과 바이에른 군대에 점령당했고 프리드리히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의 영토 및 선제후 권리는 가톨릭 교도인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겨졌고, 이 시기부터 그는 바이에른 선제후가 됐다. 1622년 네덜란드 헤이그로 망명한 프리드리히는 여생을 네덜란드와 영국이 제공한 돈으로 살았다.
페르디난트 2세는 프리드리히 5세의 선제후 지위를 공이 많은 바이에른공 막시밀리안 1세에게 주어 금인칙서를 위반하고 이를 비롯하여 신교도에 대한 지나친 재제는 전쟁이 길어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스웨덴이 반 합스부르크 동맹에 가세하자, 프리드리히도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수행하고 1630년 ~ 1632년 독일 원정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보헤미아에서의 반종교개혁과 탄압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황제군은 반란을 제압했으나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이를 비판했다. 보헤미아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잔학 행위가 이어지자 작센 선제후국이 마침내 개신교 제후동맹에 지지를 표하며 이들과 함께 싸웠다. 1621-1623년 기간에는 보헤미아에서 반종교개혁 정책이 시행되었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탄압 정책은 30년 전쟁이 단순한 정치적 분쟁을 넘어 종교전쟁의 성격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추방되거나 개종을 강요받았으며, 이는 유럽 전체의 개신교 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30년 전쟁의 확대와 국제화
1619년 보헤미아 반란은 30년 전쟁을 본격적으로 국제전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덴마크의 패배 이후 이를 대신해 스웨덴 제국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도 1630년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계속 포위당하고 있던 로마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도 스웨덴 제국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1635년부터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다.
이러한 전쟁의 확대는 1619년 보헤미아 반란이 단순한 지역적 종교 분쟁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정치적 균형과 종교적 대립을 반영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결론
1619년 보헤미아 반란은 단순한 지역적 반란을 넘어 유럽 근세사의 전환점을 이루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반란은 1618년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으로 시작되어 페르디난트 2세의 폐위와 프리드리히 5세의 보헤미아 왕 선출이라는 극적인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30년 전쟁을 본격적인 국제전쟁으로 확대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반란의 배경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반종교개혁 정책과 보헤미아의 종교적 자유에 대한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강압적인 가톨릭화 정책은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결국 정치적 혁명으로 발전했다. 프리드리히 5세의 보헤미아 왕 선출은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종교적, 정치적 균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으며, 유럽 각국을 전쟁에 개입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1620년 백산 전투에서의 패배로 보헤미아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이 가져온 정치적 파급효과는 30년간 지속된 유럽 전쟁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보헤미아 반란은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대립, 합스부르크 패권에 대한 도전, 그리고 유럽 국제질서의 재편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반란이 촉발한 30년 전쟁은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료되면서 근대 유럽의 국제질서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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