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과 현실 민주주의의 몰락: SF에서 예견된 현재
1980년대 일본 작가 다나카 요시키가 창조한 스페이스 오페라 《은하영웅전설》은 단순한 우주 전쟁 소설을 넘어 깊이 있는 정치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작품 속에서 민주주의 국가인 자유행성동맹과 전제군주제인 은하제국의 대립을 통해 제시된 정치체제에 대한 통찰은,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과 놀랍도록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양 웬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전달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시각은 오늘날 포퓰리즘, 기술 독재, 정보 조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은하영웅전설 속 민주주의의 부패와 쇠락
자유행성동맹의 민주주의 실험과 그 한계
《은하영웅전설》에서 자유행성동맹은 전제정치에서 탈출한 공화주의자들이 세운 민주주의 국가로 설정되었다. 초기에는 민주주의 특유의 효율성과 뛰어난 의견 수렴 능력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우정치와 포퓰리즘으로 인해 철저히 타락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동맹이 무너지는 과정은 수십 년간 지속된 정쟁과 전쟁 피로도의 누적으로 인한 전방위적 부패, 그리고 사상적 네거티브만이 일어나는 정치적 각축장으로의 변모를 통해 묘사된다.
동맹 정치의 핵심 문제는 트류니히트라는 인물로 상징된다. 그는 "간교한 혀와 권모술수로 대중을 현혹하는 선동가"로서 국가원수인 의장으로 선출된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유권자들이 진정한 지도자보다는 달콤한 말로 호소하는 포퓰리스트를 선택하는 경향을 예리하게 포착한 설정이다. 결국 정부는 지지율을 위해 무리한 제국 원정을 기획했다가 축출당하고, 이후 혼란을 틈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내세운 군부가 내전을 일으키지만 결국 패배하는 과정을 거친다.
양 웬리의 민주주의관과 문민통제 원칙
작품의 주인공 양 웬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그는 부패한 민주주의 정부의 실책으로 여러 차례 승리의 기회를 놓치면서도, 이상적인 전제군주인 라인하르트와의 대립에서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양 웬리가 보여주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특히 문민통제의 원칙을 지키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버밀리온 회전에서 라인하르트를 잡을 수 있던 순간에 날아든 항복명령을 받아들이며, 그는 "승리보다 더 큰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판단한다.
양 웬리의 제자 율리안 민츠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다. 양 웬리는 자신이 문민통제의 원칙을 깨는 선례를 남길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민들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이는 민주주의가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국민이 지도자를 선택하고, 그리고 국민이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야말로 어떤 정치제도보다 민주주의가 가진 장점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현실 세계의 민주주의 위기와 작품 속 예언의 실현
포퓰리즘과 정보 조작의 확산
현실 세계에서도 《은하영웅전설》이 묘사한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포퓰리즘 성향을 가진 정치인들과 유권자들 사이의 소통 방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연구에 따르면 포퓰리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비율이 높으며, 특히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선호한다. 이들은 뉴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뉴스를 타인과 공유하는 것에도 적극적이어서, 소셜 미디어에서는 포퓰리즘 성향의 관점과 아이디어들이 실제보다 과도하게 표현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체계적인 정보 조작 활동의 증가이다. 러시아의 여론조작 회사들이 트위터, 틱톡,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와 각국 정상의 SNS 계정, 언론사 웹사이트 등에 자국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글을 올리며 선동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친러시아 발언을 확산시키기 위해 틱톡 인플루언서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러시아 정부의 견해와 일치하는 일반인의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으로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허위정보 단속을 피해간다.
영국 카디프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친러시아 성향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서방 언론 기사의 댓글란에서 조직적으로 여론 조작을 펼치고 있으며, 이러한 댓글들이 러시아 언론 매체의 기사 소스로 활용되고 있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서방국 시민들이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 또는 특정 정책을 광범위하게 지지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AI와 딥페이크 기술의 정치적 악용
AI 기술의 발전은 민주주의에 새로운 위협을 가져왔다. 딥페이크 기술이 발전하면서 정치인들의 음성과 영상을 조작해 허위 정보를 확산시키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2024년 한국의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AI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조작된 선거 홍보물 120건 이상을 적발했으며, 특정 후보자의 얼굴과 음성을 조작한 허위 발언 영상이 SNS를 통해 확산되어 유권자들의 혼란을 초래했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도 AI를 활용한 가짜 이미지와 음성이 대거 등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AI로 생성된 가짜 사진을 유포했고, 반대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가짜 음성 파일이 만들어져 유권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사건에서 보듯이, AI는 SNS와 포털사이트에서 유권자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 맞춤형 정치 광고를 제공할 수 있으며, 이는 선거 과정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기술 독재와 감시 사회의 출현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과 디지털 감시
현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중국의 사회신용평가시스템(SCS) 구축이다. 2020년 전면 도입이 예고된 이 시스템은 13억 시민의 신뢰성을 평가하여 "진지함과 신뢰도가 모든 사람들 속에서 행위의 의식적 규범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국의 모든 시민들에게는 기본 사회신용점수로 1천점이 부여되며, 사회신용 등급은 4등급으로 나뉘어 D등급에 해당하면 "신뢰성이 없는" 사람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간다.
이 시스템의 문제점은 평가기준에 있다. 행동과 선호, 대인관계가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면서, 개인의 사생활과 정치적 성향까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은 이미 CCTV 6억대를 통한 감시망 '톈왕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걸음걸이까지 데이터화하는 AI 신생기업 와트릭스의 걸음인식 시스템을 현장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빅브라더 사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기술을 통한 민주적 절차의 우회
《은하영웅전설》에서 보여준 민주주의 붕괴의 패턴은 현대에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래비츠키와 댄니얼 지블랫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현대의 민주주의 붕괴는 군사 쿠데타가 아닌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선거로 당선된 지도자가 권력을 잡자마자 민주적 절차를 서서히 해체해버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헌법을 비롯한 형식적인 민주주의 제도는 온전히 남아 있지만, 그 내용물은 완전히 갉아먹힌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조지아, 헝가리, 니카라과, 페루, 필리핀, 폴란드, 러시아, 스리랑카, 터키, 우크라이나에서도 선거로 추대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포기한 정당',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 등 민주주의 붕괴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민의 역할과 책임
양 웬리의 철학과 현대적 적용
양 웬리가 제시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다. 그는 "국가가 세포분열해서 개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의지를 지닌 개인이 모여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국가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을 제시한다. 이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기술 독재와 감시 사회의 위험에 대응하는 중요한 철학적 기반이 된다.
양 웬리의 또 다른 중요한 통찰은 정치의 부패에 대한 정의이다. 그는 "정치의 부패란, 정치가의 부정축재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건 개인의 부패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가가 뇌물을 받아도 그걸 비판하지 못하는 상태를 정치의 부패라고 하는 거지"라고 말한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민들이 정치인의 부패나 잘못을 비판할 수 없는 상황, 또는 비판을 회피하는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부패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민 교육과 미디어 리터러시
AI 시대의 지역언론과 시민들은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가짜뉴스를 검증하고 AI 조작에 대응하는 저널리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포퓰리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이 높고 대안 언론이나 당파적 언론, 소셜 미디어 등으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시민들은 또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지속적인 정치 참여와 비판적 사고를 유지해야 한다. 《은하영웅전설》의 작가가 강조했듯이, 민주주의는 만인이 자신이 만든 제도와 정부를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리는 자해적인 시스템일 수 있지만, 동시에 "만인을 해칠 권리는 오로지 만인 자신에게만 있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이는 군주정이나 다른 정치체제에는 없는 민주주의만의 고유한 특성이자 장점이다.
결론: SF에서 현실로, 그리고 우리의 선택
《은하영웅전설》이 1980년대에 제시한 민주주의의 위기와 몰락 시나리오는 오늘날 놀라울 정도로 현실화되고 있다. 작품 속 자유행성동맹의 몰락 과정은 포퓰리즘, 정보 조작, 기술을 통한 감시와 통제가 일상화된 현재의 상황과 매우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특히 AI와 빅데이터 기술이 민주적 절차를 우회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시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현실은 작품이 예견한 미래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제시하는 진정한 교훈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에 있다. 양 웬리가 보여준 것처럼,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지만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헌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시민 개인의 의식과 참여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기술적 도전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시민 의식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은하영웅전설》이 보여준 것처럼, 개인의 선택과 시민의 각성이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양 웬리의 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라인하르트의 효율적 독재에 안주할 것인지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