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과 엘살바도르의 관계: 세계 최초의 법정화폐 실험의 흥망성쇠
엘살바도르와 비트코인의 관계는 암호화폐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2021년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한 이 중미 국가의 실험은 초기 큰 기대와 주목을 받았으나, 현재는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암호화폐의 법정화폐 가능성, 개발도상국의 금융 혁신, 그리고 국제 금융 기관과의 관계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사례를 제공합니다.
비트코인 법정화폐 채택의 역사
2021년 6월,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비트코인 컨퍼런스에서 이루어진 이 발표는 전 세계 암호화폐 커뮤니티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부켈레 대통령은 "단기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식 경제 밖에 있는 수천 명에게 금융 접근성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2021년 9월 7일, 엘살바도르는 마침내 비트코인을 공식 법정화폐로 승인했습니다. 새로운 법률에 따라 모든 기업은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비트코인은 기존의 공식 화폐인 미국 달러와 함께 병행하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치보(Chivo)'라는 디지털 지갑을 출시하고, 이를 다운로드하는 시민들에게 33달러(약 3만 8천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제공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인정한 법안은 47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상화폐에 대한 양도 행위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부채를 포함한 가상화폐 관련 거래를 허용했습니다. 이 과감한, 어쩌면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실험은 부켈레 대통령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졌으며, 사회적 합의 과정은 거의 생략되었습니다.
비트코인 채택의 주요 동기
송금 수수료 절감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한 가장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해외 송금 수수료 절감이었습니다. 약 200만 명 이상의 엘살바도르인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이 고국으로 보내는 송금액은 2019년 기준 약 6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약 20-23%에 달했습니다4512. 전통적인 송금 방식으로는 약 10%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지만, 비트코인을 이용하면 이러한 수수료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었습니다.
화산 지열을 이용한 비트코인 채굴
엘살바도르는 내전으로 산업 기반이 무너져 달러를 벌어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화산 지열을 이용한 비트코인 채굴은 달러 발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달러를 벌어들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4. 부켈레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야심찬 '비트코인 시티' 건설 계획을 발표했으며, 화산의 지열을 이용해 가상화폐 채굴용 전기를 공급하는 친환경 도시를 세워 투자자들을 유치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11.
금융 포용성 확대
부켈레 대통령은 비트코인 법정화폐 도입이 은행 계좌가 없는 자국민 70%에게 금융 서비스 접근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전통적인 은행 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려운 많은 시민들이 스마트폰과 인터넷 연결만으로 금융 시스템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정부의 비트코인 투자와 성과
엘살바도르 정부는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지정한 이후, 적극적으로 국가 예산을 동원하여 비트코인을 매입해왔습니다. 부켈레 대통령은 "저점일 때 사들이는 게 좋다"며 비트코인이 가격이 하락할 때마다 추가 매수를 지시했습니다. 2021년 9월 법정통화 도입 이후 비트코인을 틈틈이 매수한 엘살바도르 정부는 2024년 3월까지 약 1억 2,190만 달러(약 1,598억 원) 어치를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투자 성과는 비트코인 가격의 변동에 따라 크게 달라졌습니다. 2022년 11월경에는 약 60%의 손실을 기록했으나, 2024년 3월 기준으로는 비트코인 가격의 상승에 힘입어 약 68%의 잠정 수익률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엘살바도르가 보유한 약 2,832개의 비트코인에 대한 매도 추정 수익은 8,357만 달러(약 1,095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2024년 11월에는 엘살바도르가 보유한 비트코인이 5,930개로 증가했으며, 이는 약 5억 219만 달러(약 7,313억 원)에 해당했습니다. 당시 미실현 매도 이익률은 90% 안팎에 달했습니다. 현재 엘살바도르는 약 6,000-6,101 BTC(약 5억 3,000만-5억 8,600만 달러)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트코인 사용의 현실
그러나 비트코인이 법정화폐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비트코인을 사용하는 국민은 많지 않았습니다. 2023년 말 기준으로 비트코인을 사용해 본 국민은 전체의 12%에 불과했고, 비트코인을 받는 사업장도 전체의 20% 수준에 그쳤습니다.
2022년 4월 미국 민간 연구기관인 전미경제연구소(NBER)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성인 1,800명을 대상으로 한 대면 조사에서 응답자의 20%만이 비트코인 지갑 '치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들 중 20%는 정부가 제공한 30달러조차 사용하지 않았다고 응답했습니다.
국제 송금 측면에서도 비트코인 사용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엘살바도르 중앙은행 통계에 따르면, 2021년 9월부터 2022년 6월까지 국내로 송금된 64억 달러 중 가상화폐 지갑을 이용한 송금액은 전체의 2%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정부가 비트코인 송금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가 현실에서는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IMF와의 관계 및 정책 변화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정책은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IMF는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과 잠재적 위험을 경고하며, "가상화폐에 법정통화 지위를 부여하지 말라"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2025년 초, 엘살바도르는 IMF로부터 14억 달러의 대출을 조건으로 비트코인 정책을 크게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2025년 1월 29일, 엘살바도르 의회는 비트코인 법 개정을 통과시켜 비트코인 관련 정책을 대폭 변경했습니다. 이 개정에 따라 비트코인의 법정화폐 지위가 공식적으로 박탈되었으며, 기업들이 의무적으로 비트코인 결제를 받아야 하는 조항도 철회되었습니다.
개정된 법안은 '통화'라는 단어를 제거했지만 여전히 비트코인을 "법정 수단"(legal tender)으로 언급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자 카를로스 아세베도는 "누군가 당신에게 돈을 빚지고 비트코인으로 지불하려 한다면, 당신은 비트코인으로 지불받는 것을 거부할 수 있지만, 법정 수단이라면 거부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비트코인의 사용은 이제 강제가 아닌 선택 사항이 되었습니다.
최근 상황 및 미래 전망
2025년 3월 현재, 엘살바도르는 IMF의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국가 비트코인 신탁(Fidebitcoin)을 청산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엘살바도르는 2025년 2월 17일을 마지막으로 비트코인 매입을 중단했으며, 기존에는 매일 1 BTC씩 구매하는 정책을 시행해왔으나 IMF 대출 협정 이후 암호화폐 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했습니다.
몇몇 분석가들은 부켈레 대통령의 비트코인 정책이 실제로는 "완전한 홍보 전략"이었다고 주장합니다. TIME 매거진의 기자는 부켈레 대통령의 고문들이 비트코인 채택을 "훌륭한 리브랜딩"이자 "국가의 국제적 인식을 변경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언급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결론
엘살바도르와 비트코인의 관계는 암호화폐가 국가 경제에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처음에는 해외 송금 수수료 절감, 금융 포용성 확대, 경제 다각화 등의 목표를 가지고 시작된 이 실험은 현실에서 많은 도전과 장애물에 직면했습니다.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 실제 사용률 저조, 국제 금융기관과의 갈등 등은 암호화폐를 법정화폐로 사용하는 것의 현실적 어려움을 보여줍니다.
현재 엘살바도르의 비트코인 정책은 초기의 야심찬 계획에서 상당히 후퇴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은 암호화폐와 국가 경제의 관계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제공하며, 앞으로 다른 국가들이 암호화폐 정책을 수립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 엘살바도르의 경험은 암호화폐가 가져올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신중한 접근과 체계적인 준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